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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과 해석판 악보

 

 서양음악의 여린내기적 성향과 관련하여 최초로 선율에 대한 그루핑의 원리를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거론한 이는 리만(Hugo Riemann, 1849 ~ 1919)입니다. 단, 그는 서양음악이 여린내기적 성향을 갖게 된 까닭을 천기(天機)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리만은 「태초에 상박(Auftakt)이 있었다」고 했으며, 「상박은 인간이 물려 받은 선천적인 근본 법칙이다」라고 강변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악곡은 상박으로 시작하는 것이 원칙이고, 하박으로 시작하는 곡은 상박이 생략된 것일 뿐이다」고 자신 있게 단정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여린내기로 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동양 음악의 리듬 체계들은 천기(天機)를 거스르고 있는 셈입니다. 산속에서는 그 산의 윤곽을 볼 수 없듯이, 리만은 서양음악의 여린내기적인 성향이 전적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운율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리만은,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습자들을 가엾게 여겨 누구나 그것을 이해하고 그리하여 기계적인 연주가 아니라 예술적 혼이 깃든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그와 같은 목적으로 「프레이징 이론」을 발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만, 리만이 사용한 '프레이징'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프레이징'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슈베르트의 가곡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는 아래 악보72와 같은 전주로 시작됩니다. 이 전주 부분은 같은 제목의 부제가 붙은 현악 4중주 제14번에서 제2악장의 주제로 다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선율은 다음 세 가지 운율적 패턴 중 하나로 해석될 가능성을 가집니다. 즉, 악보72의 a, b, c가 바로 그것인데, a는 강약약격(dactyl) 또는 장단단격, b는 약강약격(amphibrach) 또는 단장단격, c는 약약강격(anapest) 또는 단단장격입니다. 물론 리만은 이 중에서 c가 옳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획일적 해석을 경계하는 반론도 존재합니다. 한데, 이와 같은 분석을 악구법(Phrasierungslehre, 독)이라고 하고, 또한 이와 같은 형태의 그루핑에 대해서도 리만을 비롯한 19세기의 음악학자들은 '프레이징'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는 아티큘레이션이나 프레이징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탓입니다.

 

        악보72. 악구법(Phrasierungslehre, 독)과 리만의 프레이징 ―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리만은, 악보72의 c에 해당하는 이음줄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선율의 구조를 파악하거나 선율의 구조를 형성하는 방법」으로서 '프레이징'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관련 내용 ☞ p.150, 참고: 리만의 프레이징). 그런데 그가 말하는 소위 "모티브는 상박으로 시작된다"는 식의 「모티브의 상박적 해석법」이란 사실상 여린내기적 운율 패턴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약강격인 아이앰(iamb), 약약강격인 아나페스트(anapest), 약강약격인 앰피브랰(amphibrach) 등의 운율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소위 「상박적 해석법에 의한 모티브」의 정체성은 경우에 따라 무리하고 억지스러울 때가 없지 않습니다만····, 어쨌거나 그와 같은 「선율의 구조적 형태」를 표시하는 (과다한) 이음줄들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음줄들은 그루핑을 의미하는 기호에 다름 아닌 것이며, 아울러 그와 같은 그루핑이, 그러한 이론을 주장하고 또한 그러한 이론이 광범위하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서양음악에 있어서는 상당한 보편성을 지닌 음악 어법임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주가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설명할 것 없이 리만의 프레이징이란 결과적으로 '여린내기적 운율 패턴'에 맞춘, (선율에 대한) '운율적 아티큘레이션'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쉽습니다(※ ☞ p.102, 보기8).

 「선율 구조에 대한 상박적 해석법」은 모든 음악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공식 같은 것을 구하고자 한 그의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일종의 과학적인 원리나 이론 같은. 그러나, 예술은 과학과 다릅니다. 작곡가나 화가가 규칙이나 공식 같은 것에 얽매여 곡을 쓰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예술에 있어서는 개성이 없는 모범 답안보다는 개성적인 틀린 답이 정답일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어떤 반역이나 불규칙이나 때로는 천지개벽까지도 다 관용(寬容)하는 것이 바로 예술 혼(魂)인 것입니다. 미학적 감각, 표현 양식, 표현 기법 등이 시대에 따라 다르고 개인에 따라 다르고 악기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음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음악에 적용할 수 있는 그와 같은 공식이란 애초에 신기루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곡의 해석에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 음악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경향(傾向, tendency)이나 속성(屬性, attribute)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찾아낸 「여린내기의 원칙」 역시 경향이나 속성이라 해야 할 것이지, 그것을 규칙이나 공식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의 이론이 열렬한 추종자와 반대론자를 동시에 양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바흐를 비롯하여 모짜르트 베토벤 등 거장들의 작품에 대해, 작곡가에 의한 아티큘레이션의 기호들까지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이론에 의한 '공식'을 적용하여 새로이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그리하여 「프레이징이 표시된 판(Phrasierungsausgaben)」을 출간했습니다. 당연히, 그와 같은 그의 독선은 비난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선의(善意)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대가들의 작품에 간과할 수 없는 누(累, trouble)를 끼쳤으며, 그를 추종하는 후학들에 의해 그 누가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그리하여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운율(리듬)에 의한 그루핑(아티큘레이션)의 실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서양음악의 어법이 낯설고 생소할 수밖에 없는 비서양인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양음악의 심연(深淵)을 이해하고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이론인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서양음악의 어법에 내재된 보편성의 일단을 이해하게 됨과 아울러, 리만 이후에 출간된 해석판 악보들에 그려진 정체 불명의 프레이징과 아티큘레이션의 이음줄들에 대한 분별력 있는 후학들의 반발과 이후에 전개된 정오(正誤, rectification of errors)의 수순 등, 프레이징과 아티큘레이션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변증법적인 진화의 과정 또한 납득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리하는 동안 우리 친구들은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의 기초를 다지게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오늘날에도 리만을 추종하여 그의 이론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그의 이론에 근거하여 프레이징이나 아티큘레이션을 설명하는 제2, 제3의 저서들을 흔히 볼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이론을 참고하여 프레이징이나 아티큘레이션의 이음줄들을 붙인 해석판 악보들이 적지 않음은 그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해석판 악보의 원조 체르니   

 사실, 해석판 악보의 출판은 베토벤의 제자이자 「체르니 30번, 40번, 50번」등의 피아노 연습곡집으로 유명한 체르니(Karl Czerny, 1791 ~ 1857)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체르니는 1837년 바흐의 작품(클라비어 곡)에 운지 기호, 템포, 셈여림표, 프레이징과 아티큘레이션을 나타내는 이음줄 등 각종 악상 기호들을 상세하게 붙인 교정판(해석판)을 출간함으로써 이 일을 시작했는데, 원래의 뜻은 학습자들을 돕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당연히 이 일은 이후 많은 모방자들을 낳았습니다. 게다가, 1890년경 발표된 리만의 「프레이징 이론」과 「프레이징이 표시된 판(Phrasierungsausgaben)」은 그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그리하여 바흐, 헨델,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인기 있는 대가들의 원전판 악보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이른바 해석판 악보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자세하게 해석이 되어 있는 악보가 사람들에게 보다 편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출판업자 역시 잘 팔리는 해석판 악보의 출판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했으니.

 그런데, 그 해석이란 것이 대개는 시대적 음악 어법의 특성이나 작곡가 개개인 특유의 음악 어법에 대한 연구와 검토가 미비한 상황에서 무책임하게 행하여진 것이어서, 자연히 해석·교정자의 시대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음악 어법에 의해 (또는 리만의 무리한 이론에 의해) 원전이 심각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시대별 작곡가별 음악 어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소위 「해석판」으로 불리는 악보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전판 악보를 다시금 찾는 시류(時流)가 형성되었습니다만, 그러나 대개의 원전판 악보에는 전문가들에게나 소용될 약간의 기호만 표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한데, 모든 악기의 원전판 악보가 해석판 악보로 대체되는 수난을 겪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기타 악보는 그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비켜나 있었던 덕분에 적어도 프레이징이나 아티큘레이션을 나타내는 이음줄들이 추가된 해석판은 거의 없습니다(뒤나믹 기호들이 추가된 예는 더러 있습니다만). 「그러므로 기타 연주자는 프레이징이나 아티큘레이션에 관한 한 해석판 악보와 무관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악보란 플라스틱 그릇을 찍어내듯 연주를 양산해내는 금형(金型)과 같은 것입니다. 음반이나 연주가들의 연주에는 당연히 해석판 악보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교향악 등. 우리는 그러한 음악을 들으며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해석판의 영향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기타리스트라 해서 그러한 영향권의 범위를 벗어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리만의 「프레이징 이론」이라는 지뢰밭 속에서 상당한 혼란을 치른 여파로 프레이징과 아티큘레이션에 관한 주제는 그 후 그 누구도 섣불리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용광로 속에 던져진 감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서, 프레이징 및 아티큘레이션에 관한 한 은밀하게 전하는 구전전수(口傳傳授)법이 널리 통용되게 되었습니다. 그 구전전수법이란 것이 고작해야 스승의 연주 방식을 그대로 흉내 내고 모방하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아무튼 학습자로서는 그와 같은 내밀한 경험의 축적에 의해 언젠가 스스로 모종의 통찰력을 갖게 될 때까지 ― 귀납적인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 자신에 의한 해석은 마냥 유보해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뜻도 모르고 시를 읊는 것이 무의미하듯, 내용도 모르고 남이 하는 것을 그대로 흉내 내는 연주 또한 개탄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티큘레이션이나 뒤나믹을 포함하여 악상 표현이란 작곡가의 몫에 연주자의 몫을 더함으로써 온전한 것이 되는 성격의 것이므로 「해석을 기피하는 태도」란 연주자로서의 역할을 등한히 하고 자신의 몫(개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하겠습니다. 연주자로서의 존엄성을 스스로 내팽개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술가로서의 생명이라 할 창의성을 가진 연주자로의 성장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어쨌거나 지금 당장에라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칙 연산이나 삼각함수 등에 대한 아무런 수학적 기초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인생 경험만으로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 내는 깨달음의 경지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성공적인 깨달음을 위해서는 출발하기 전에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갖출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프레이징과 아티큘레이션에 관한 일반적인 관례나 해법(解法, solution)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음악가들의 인식의 저변에 공유되고 있는 그루핑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또는 공약수를 이해함으로써 해석을 위한 바탕(기초 지식)을 마련한 다음, 부족한 것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어서 경험하며 그러한 경험을 통해 채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학습 체계이자 순서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