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스와 세하주법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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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잡지 '클래식기타'  2000년 3월호에 게재되
     었던 것입니다.  < 필자 : 신현수 >  

        

        


♧ 퀸카 피아니스트 아가씨 바람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 ♧


  로망스. 멜러디도 단순하고 반주부도 매우 단순하다. 단지  악보
만 보고 말한다면 영락없이 초보자용의 곡이다 (단, 그것을 기타로 
연주해야 한다면 절대로 초보용의 곡이라 말할 수 없을 테지만. 정
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감히 그것을  초보용  기타곡이라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설레게 
할 수가 없다. 듣다 보면 어느새 애틋한 심정이 되어 그 어떤 향수
에 젖어들고 만다. 그것은 들을수록 주술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지
는 그런 곡이다. 그러나, 반드시 클래식기타로 연주될 때에만 그렇
다 !
                          
  시골역 한적한 곳에서 남루한 기타케이스를 깔고 앉은 채 연주에 
열중하고 있던 한 중년사내로부터였다, 지윤이의 마음을 온통 뒤흔
들어 놓은 문제의 로망스를 듣게 된 것은. 사내는 마치, 총기 케이
스를 깔고 앉은 채 날렵하게 쭉 빠진 망원소총을 익숙한 솜씨로 요
모조모 만지작거리며 손질하고 있는 킬러 같았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 닥쳐도 결코 유유자적함을 잃지 않을 프로페셔널 킬러.  그
녀가 갑자기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순간에도 멀리 자신의 
방에, 언제나 그렇듯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피아노를  떠올린  데 
대한 일종의 반사작용 같은 것일런지도 몰랐다. 탱크 !,  무한궤도 
바퀴조차 달려 있지 않은. 그랬다. 피아노, 그것은 영락없이  앉은
뱅이 붙박이 탱크다. 아무리 잘 연주할 수 있으면 뭐하나.  트럭을 
동원하여 꾸역꾸역 실어다 주지 않는 한 실전 투입 자체가  불가능
한 것을. 시골역에까지 가볍게 끼어차고 와서 흥이 날  때  저렇게 
아무곳에서나 연주할 수 있는 기타(guitar). 그 사내가 가진  그러
한 자유가 부럽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스페인 민요라 하기도 하고 영화 '금지된 장난'의 주제곡이라 하
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기타 연습곡이라 하기도  하는  ― 
그러고 보니 쬐끄만 것이 아이디(ID)는 꽤나 여럿이다 ― 그  로망
스를 그때 처음 들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단순한 곡이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휘저어 놓을 수 있음은 예전에 미처  몰
랐었다. 이름모를 선승(禪僧)이 던져 놓은 화두(話頭)가 갑자기 풀
린 듯, 그 순간 지윤은 기타 소리에 감전되어버린 것이었다.

  기타를 연주하던 그 사내는 우습게도 낯익은  사람이었다.  그는 
키가 작은 편이었으며 체구도 왜소했는데, 지윤이네 집 근처에  있
는 기타학원에 드나드는 것을 가끔씩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오랫
만에 바람도 쏘일겸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안으로 간 것이 그  사내
를 그곳에서 보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우연 ? 하지만, 이 정도의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상사일 뿐이다,「손바닥만한(?) 나라
」라고 푸념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 사내도 바람쐬러 왔을까? 
아님, 다른 볼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람난 유부녀라도 
꼬셔 볼려는 음흉한 속셈을 감추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사내의 고
지식하고도 융통성없어 뵈는 생김생김을 보고 지윤은 피식 웃고 말
았다.
                      
  평소 절대로 서로 아는 척하기 없기로 작정하고 지내던 이웃일지
라도 여행중 낯선 곳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면 엉급결에  서로  아는 
체하며 인사해 버리기 십상이다. 행여, 그런 불상사가 벌어질 것이 
싫어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짐짓 딴 곳을 보는 척하며 들었지만  기
타소리는 어느새 지윤이의 가슴속에 도발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었
다. 직접 연주해 보지 않고는 결딜 수 없게  만드는  선동적이고도 
도전적인 소리.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이제 고작 로망스  따위를 
연주하고 있다니!」하고 한 편으로는 내심 조소를 보내며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골역의 맑고 서늘한 공기는 기타의 공
명통으로부터 밀려나오는 농도 짙은 파문의  가닥가닥을  가감없이 
그대로 잘 실어 나르고 있었다. 기타 소리에는 듣는  이를  전율케 
하는 어떤 힘이 실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숨돌릴 틈도 없이 악보를 뒤적여 로망스를 찾아 
내고서는, 그리고 한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의 먼지를 대충 털어낸 
다음 한소절 한소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
까. 몇 소절 지나지 않아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두통거리.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여러 선을 동시에 눌러대야  하는  세하(바레)주법 
때문에 골경련이 나기 시작했다. 기타를 산 지  수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별 진척없이 실력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음은 순전히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기타연습을 해
보자고 덤빌 때마다 별 저항도 못해 보고 주저 앉게 했던 바로  그 
원흉. 「 으~ 이 웬수 !」, 손가락에 퍼렇게 기타선자국이 멍들 듯 
패이도록 눌러대도 틱틱거리는 파열음만 나올 뿐.  도대체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이 고통을 어떻게 참고 연주하는 것일까.  언제
부턴가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때였
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신통방통한 생각. 그렇다. 피아노로  편곡
된 악보가 있지 않은가. 역시 피아노는 악기중의  제왕인  것이다. 
세상에 피아노 용으로 편곡되지 않은 악보가 있던가! 편곡된  로망
스 악보를 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희색이 만연하여 피아노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되풀이하여 연주해 보아도 시골역에서 들었던 그 
음악이 아니었다. 어쩜 이럴 수가 !  실망, 실망. 지윤이의 피아노 
실력은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피아노가 뱉어내는 
소리는 맹숭한 분위기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로
망스가 아니다, 로망스가 아냐」. 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기타 
소리에 실려 있던 그 애틋함을 재현해낼 수 없었다. 치미는  짜증. 
왕짜증이다. 마침내 지윤은 건반을 쾅! 내리치고는 연주를  중단하
고 말았다.

  심통을 이기지 못해, 기타 악보와 피아노 악보를 세심하게  서로 
비교해 보았다. 하지만, 뭐가 잘못된 것인지. 화음이나 베이스음은 
당연히 피아노 쪽이 더 풍부한 음향으로 되어 있었다. 멜러디는 완
전히 동일하고... 하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그 연주 결과였다.  자
신의 피아노 연주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약  오르게도,  시골역에서 
중년사내가 연주한 바로 그 로망스의 애틋한 정취와는 거리가 있었
다. 피아노로 연주하라면 초견으로 곧바로 연주할 수 있는  단순한 
내용의 악보. 이 곡에 무슨 말못할 사연이나 비밀이 담겨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거금(?)을 축내어 로망스가 들어 있는 두 개의  CD를  구입했다. 
물론, 그중 하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연주한 것이고, 나머지 하
나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것. 그 둘을 비교하여 들어  본  후에야 
지윤은 어렴풋이 짚히는 데가 있었다. 연주능력의 차이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또다른 이유. 그것은 바로 기타와 피아노라는 두  악기의 
고유한 소리가 가진 모종의 성격차 같은 것이었다. 피아노  소리는 
매끄러운 편이다. 기타에는 그러한 매끄러움은 없다. 하지만, 소박
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울림이 있다. 때로는 허스키하기도 하고  때
로는 티없이 맑은. 게다가 은근히 비브라토까지  더해지면  그것은 
그대로 살아 숨쉬는 가수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타
선이 손가락으로 퉁겨질 때의 그 팽팽한 장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소리의 질감. 활시위가「텅!」소리를 내며 허공에 부딪히듯,  그와 
같은 내밀한 힘이 더해진 소리. 그것이 밀려 와서 톡톡 고막을  두
들기는 것이다. 마치, 야심한 밤에 울리는 오래된  산사의  은은한 
종소리처럼. 「완전히 항복이다」지윤은 마침내 결코 피아노로  연
주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죽든
살든 기타와 싸워서 결판을 내어야 할 일임이 분명했다.  「마음먹
으면, 기타라 해서 맞장 못뜰 이유가 없지」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모진 연습을 견디어 내고 오늘의 피아니스트 전지윤이 된 것  아닌
가. 세하(바레)주법에 대한 두려움이 못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
은 아니었지만···


                              악보1 

  개발새발 음자리를 찾아가며 연주하는 것이긴 했어도, 첫 몇  소
절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 제 6 소절까지는 시원스럽게 잘
도 넘어갔다. 그리고 제 7~10 마디는 상당히 까다로웠지만  그래도 
오기로 견디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고 나면 e단조의 첫번째 도막은 
그럭저럭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E장조로  된  부분(두번째  도막) 
중, 제 21 마디 이후(악보1, 2)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황당. 
      
                              악보2 
왼손 1번손가락으로 계속 바레(세하)를 해야 하는 소절들이 연거푸 
등장하는데, 그야말로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는 고통만 있을 뿐  소
리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제 27마디(악보3)의  왼
손운지는 손가락을 아무리 벌려도 음을 짚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
능. 「지판의 음자리조차 제대로 짚을 수 없으니,  도대체  어쩌란 
말인감?」.
      
                              악보3 
  대개의 피아니스트가 그러하듯이 지윤의 팔, 그중에서도 특히 손
가락 동작에 관여하는 근육들이 뭉쳐 있는 하박(下膊) 부위는 눈에 
띌 만큼 튼튼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러한 조건이 별  도움
이 되지 않는 듯. 며칠 간 씨름해 보았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제 27마디는 눈 딱 감고 넘어 간다 치자. 그래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 제 29마디(악보4)에까지 도달하면 아무리 힘을 주어도  세하
로 짚은 ③번선 라는 아예 소리조차 나지 않고 손가락은 고통의 경
지를 넘어 마비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을. 그것은 쉽사리  넘을  수 
없는 완고한 벽이었다. 하지만, 「전지윤의 사전에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악보4 


♧ 퀸카, 소박 맞다 ♧

  어렵사리 결심하고 찾아 간 지윤에게 중년 사내는 냉소적인 반응
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왕초보인 주제에 제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배우겠다니··· 「로망스에 나오는 세하주법만  배울  수 
없겠느냐」고, 스스로도 괜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 지윤이 제의했던 것이다. 중년 사내는 그녀를 한  번  흘낏 
쳐다 보고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얀 것! 여기가 뷔
페 식당인줄 아나?」, 아마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
가 그녀에게 피아노를 그런 식으로 가르쳐 달라고 했다면 그녀  역
시 그랬을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초보자로 등록하여 처음부터  차
근차근 배워 나갈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렇
다 해서 달리 중년사내를 설득할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윤은 
무척 자존심이 상한 채, 어쩔 수 없이 학원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
다. 집으로 돌아오니, 방 한 구석에 숨죽이고 놓여 있는 기타가 애
물단지로 여겨졌다. 
            


♧ 안되면 되게 하자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전, 지윤은 다시 그 학원을  찾
았다. 이른 시간을 택했던 것은 학원생이 거의 없는 시간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중년 사내는 가볍게 목례를 보냈을 뿐, 그녀의 등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연습에만 열중했다. 지윤은 구석 자리에 놓인  의
자에 앉아 잠시 사내의 연주를  듣기로  했다.  사내는  바흐(J.S. 
Bach)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왼손은 거의  세
하주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매우 편안
해 보였으며 왼손 역시 이완된 자세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
아!」 지윤은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저런 무지막지한  운지
를 저렇게도 쉽게 그리고 부드럽게 계속할 수 있다니···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소 촌스럽게 생기긴 했지만 그 사내는 
세하주법에 관한 한 대가임이 분명했다. 「매달리자」, 지윤은  마
음을 다잡았다.

  그는 계속해서 바흐(J.S. Bach)의 음악을 몇 곡 더 연주했다. 아
마 바흐의 음악을 선호하나 보았다. 덕분에 그녀는 실내를  찬찬히 
둘러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었던  터라 
피아노와 그리고 스탠드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몇 대의 기타를  본 
것이 기억의 전부였었다. 다시 살펴보니, 한쪽 구석에는 큼직한 책
상이 놓여 있고, 책상 곁에는 퍼스널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컴퓨
터 케이스에 자랑스럽게 적혀 있는 '386'이라는  표시.【필자주  : 
이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90년대 초입니다.】 책상 가까이  피
아노가 놓여 있고, 피아노 뒤로는 큼직한 책장들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 한 책장 옆면에 붙어 있는 빛바랜 기타 독주회  포스
터는 아마 중년사내의 젊은 시절의 것일 게다.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양이었지만 악보들이 꽂혀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기타 악
보보다는 피아노나 바이얼린 악보 등이 더 많아 보이는 것이  눈길
을 끌었다. 책장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음악서적
이 아니라 컴퓨터 관련 서적이라는 점은 다소 격에 맞지 않는 느낌
이었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잡다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주간지 같
은 것도. 그런데, 정말 기이한 것은 책장 아래쪽에 꽂혀 있는 해부
학 관련 서적들. 한두 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터이나  무려 
4, 50여권쯤 되었다. 그것도 손때가 묻은 흔적들이 역력한. 원서와 
번역서 등이 뒤섞여 있었는데, 책명을 옮겨 본다면 대충 다음과 같
을 것이었다. 인체해부학, 생체역학, 운동생리학, 기능해부학,  골
절정복, 운동치료학, 뇌신경학, 계통해부학 등등. 보통 사람의  서
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책은 아니었다. 「그는 실패한  의과
대학생이었을까?」아무튼 이 정도의 단서들만으로도 사내는 그녀의 
연구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사내는 바흐의 샤콘느(BWV 1004)를 마지막으로 잠시 연주를 멈추
었다. 무반주 바이얼린 파르티타 2번 중의 마지막 곡. 「저 엄청난 
곡을 여기서 듣게 되다니」. 왜 기타를  '작은  오케스트라'라고들 
하는지 실감이 났다. 중년 사내의 연주에는, 아마 이 세상에는  존
재하지 않을 다양한 악기들의 실체가 악구에 따라 화려하게 명멸했
다. 네온사인의 눈부심이랄까. 그녀는 전신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피가 끓는 듯한 전의(戰意), 연주가로서의 본능적  반사작
용에 의해 지윤은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호적수를 만난  탓이었
다.

  사내가 연주를 멈춘 틈을 놓질세라, 한 쪽에 놓여 있는 피아노를 
가르키며 그녀가 끼어들었다.

  『저···  선생님의 연주 잘 들었습니다. 정말  좋군요.  그런
데, 공짜로 선생님의 연주를 감상한 답례로 제가 저기 있는 저  피
아노를 잠깐 연주해 보면 안될까요?』

  「히,히!  '답례'라니, 잘도 둘러댄다. 음흉한 속셈을 갖고 호시
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으면서···」지윤은 다소 겸연쩍은 기분
으로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사내는 잠시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
지만 빙긋이 웃으며 곧 원래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러시죠.』
              
  사내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날렵하게  피아
노를 향해 움직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착달라 붙는 베이지색 스
판 레깅스바지의 매끄러운 질감 위로 그녀의 싱그러운 젊음이 아름
다운 동선(動線)을 그려내고 있었다. 쇼팽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녀
가 특히 좋아하는 음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서먹서먹한 분위
기를 바꾸기에 적합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쇼팽의  폴로네이즈 
Ab장조(Polonaise As-Dur Op.53). 낭낭한 피아노 소리가 실내를 가
득 메워 나갔다. 지윤은 이어서 쇼팽의 발라드 f 단조(Op.33)를 연
주했다. 사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지윤은 
마지막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한 곡을 연주할까 하다가 도발적인 장
난끼가 발동하여 사내가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바흐의 샤콘느를  연
주하기로 맘먹었다. 이 곡은 원래 바이얼린을 위해 작곡된  곡이지
만, 여러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된다.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곡. 연주를 끝내자 지윤은 다소 거칠어진  호
흡을 가다듬으며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었다.

  『브라보 ! 』 사내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는 나이를 잊고 어
린아이 같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마냥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이야기가 무척 잘 통했다. 계략이 드디어 성공을 거둔 것이
었다. 지윤은 「기타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울 여건이 되지  않으
며 그럴 마음도 없다. 단지 로망스 한 곡만 제대로 연주할 수 있으
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선 당장에  세하(바레)
주법의 운지가 되지 않으며 코드(화음)를 제대로 짚을 수 없는  곳
도 있으니 이를 해결해 달라.」는 요지의 생각을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었으며, 사내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
하지만, 연주자세조차도 되어 있지 않으니 당장에 세하주법만을 가
르치는 것은 거의 무모한 일이다. 제발 2, 3개월 정도만이라도  기
초를 배우고 나면 그 후에 지체하지 않고 세하주법의 비결을  가르
쳐 주겠다」고 그가 응수했다. 

  지윤은 그러한 사내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
었고 더 이상 무리한 주문을 할 정황도 아닌 터인지라  흔쾌히  그 
말에 따르겠노라 대답했다. 지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끝
내 확신이 서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악보를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이곳을 좀 봐 주세요. 스물일곱번째 마딘(악보5)가요? 암튼 이 
부분은 손가락을 아무리 벌려도 음을 짚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
하거든요. 선생님께서 도와주신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
아서요. 손 자체가 작으니···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도 늘  그땜
에 고생이죠.』

                                         악보5 
  그가 기타를 건네주며 지윤에게 직접 짚어 보일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가까스로 제 8, 9번 포지션 간의  경계지점인 
제8번 프렛 위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며, 중년사내가  자신
의 손을 불쑥 내밀어 보였는데 놀랍게도 그의 손은 지윤의  손보다 
더 작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해서, 직접 손을 맞대어 비교해 보니 투박하고 억센  손이긴  했지
만, 분명 손가락 길이는 지윤의 것보다 짧았다.

  그가 그 부분을 직접 연주해 보였는데,  새끼손가락은  여유있게 
제9번 프렛에까지 닿고 있었다. 기왕에 내친 걸음. 무례를  무릅쓰
고 다시, 손뼘을 재듯이 하여 손을 맞대어 보았으나 그의 손보다는 
지윤의 손이 좀더 넓게 벌어졌다. 「어쩜 이럴 수가」 쉽사리 납득
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가 마술을 부리고  있음이  분명했
다.

  그가 다짐하듯 말했다.

  『이 부분의 운지는 지금 당장에라도 충분히 짚을 수 있어요. 요
령만 안다면요. 일종의 트릭 같은 것이지요. 원리를 알고 나면  피
식 웃고 말 눈속임 같은 것일 뿐입니다. 아마 지윤씨의 손이라면 4
번손가락으로 제9프렛 넘어서까지 짚을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어
요. 하지만, 아직은··· 때가 되면 가르쳐 드리도록 하지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손이 작기로야 제 손보다 작은 사람은 드뭅니다. 손이 큰 사람
이라면 굳이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도 짚을 수 있는  화음이
지만, 손이 작은 사람에게는 별도의 기술이 필요해요. 그러한 테크
닉을 구사하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패시지가 
되겠지요. 화음이나 세하주법을 힘들여 짚어야 한다면 그러한 연주
자로부터 정상적인 연주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왼손운지에 온통 
신경을 쓰게 되어 오른손 탄현에 음악적인 표정을 실을 여유가  없
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오른손 탄현인데  말입니
다. 기타연주에 있어서,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한, 왼손운지 
역시 오른손 탄현동작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고 이완된 상태로  행하
여져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이완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왼손
운지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고 연습하여 그 해결책을  강구해
야 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해당 패시지의 왼손운지가 특별히 어렵
기 때문이 아니라  대개는  그것을  운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
(know-how)이나 테크닉이 아직 연주자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타연주자는 선을 직접 
뚱겨서 음을 만들어내는 오른손 탄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왼손운지가 그러한 집중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지요. 왼
손운지는 항상 편안하고 여유가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왼손은  오
른손가락이 뚱겨내는 미묘한 뉴앙스의 음에다 비브라토 등의  표정
을 더해 주는 동업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굳이 그의 진중한 어투가 아니라 하더라도, 중년사내의 연주로부
터 이미 상당한 신뢰감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지윤은 그의 말에서 
예사롭지 않은 전문가적 식견의 깊이를 느끼고 자세를  고쳐  앉았
다.

  『말하자면, 세하주법 역시 짚을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
마나 편안하고 이완된 상태로 짚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입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기타로 연주하는 로망스를 들으면 분
명 초보적인 수준의 학습자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는  곡쯤으로 
생각할 겝니다. 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아요.  음악적  내용이야 
초급수준에 해당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중급 수준의  난
이도에 해당하는 왼손운지가 요구되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음악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기교상의 문제로 인해 결코 초급  수
준의 곡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망스의 왼손운지를 편안하고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왼손운지에 관한 한, 웬만한  중
급수준의 곡은 무난하게 운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중년사내는 느릿느릿 말하고 있었지만 간간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의 줄기를 더듬어 나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말에 열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한 사고의 흐름을  깨
뜨리지 않기 위한 배려로 인터벌이  생길  때마다「그렇군요」하고 
지윤은 적당히 맞장구쳤다.
              
  『초급수준을 벗어나서 중급 이상의 수준으로 도약하려  할  때, 
부딪히게 되는 벽 중의 하나가 바로 세하(바레)주법입니다. 초보자
에게 있어서 세하주법이란 일종의 지옥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것을 충분히 익혀서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오히려 전가(傳
家)의 보도(寶刀)나 마이티 카드(mighty card)이기라도 한  것처럼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휘두를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줍니다. 세하주
법이란 그야말로 기타 운지법에 있어서의 꽃이라 할 수 있어요. 기
타음악의 광대무변한 세계가 그때부터 비로소 열리기 시작하는  것
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세하주법에 능숙하지 못하다면 항상 제1포
지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니 그  갑갑함이  오죽하겠습니까. 
아름다운 연주곡 중에서 제1포지션에서만 연주할 수  있는  곡이란 
거의 찾아 볼 수 없거든요.』

  중년사내 혼자서만 계속 이야기하게 두는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지윤이가 말을 거들었다.

  『세하주법을 충분히 익히고 나면 보통 운지처럼 그렇게  편안한
가요? 선생님의 말씀은 그렇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긴 하지만, 실감
이 나지 않아서요.』

  그가 연속되는 세하를 얼마나 편안하게 운지하는 지  이미  익히 
관찰한 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렇게 편안하게 운지할 수 있다
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통상적인 운지보다 오히려 세하주법이 더  편하게  느껴지거나 
또는 약간 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통상적인  운지
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왼손운지와 
관련된 어려움이 있는 악구에서 그러한 어려움이 세하주법을  응용
함으로써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세하주법이 아닌 
통상적인 운지로 연주할 수도 있는 악구에서 말입니다. 바로, 세하
주법이 마이티 카드(mighty card)가 되어 주는  예라  하겠습니다. 
학습자가 세하주법을 극복한 후,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면 마치 구
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감에 넘치게 되
지요.』

  「자유····」지윤은 어렴풋이 그 기분을 이해할  것도  같았
다. 『선생님이 바흐를 연주하실 때 보니  세하주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맞아요. 바흐의 음악과 같이 폴리포니(Polyphony ; 多聲) 양식
으로 되어 있는 곡은 세하주법을 사용하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경
우가 드물지요. 또는 세하주법을 사용하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패
시지조차도 세하주법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용이하게 연주할 수  있
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

  『편안하게 세하주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기존의 교수법이라면 아무래도 4, 5년 이상은 걸리겠지요.  그
리고 교수법이 좋지 못한 경우, 10년 이상의 수업과 노력을 통해서
도 여전히 세하주법이 정교하지 못한, 불행한 예도 드물지  않습니
다.』 

  중년사내는 약간 장난끼 섞인 미소를 지었는데, 순간 지윤은  사
내의 얼굴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해서 잠시 어지러웠다. 중년사내
가 지윤을 달래는 듯한 투로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불과 수개월 내에 충분히 그 비결을  가르칠  수 
있어요. 어느정도 기초가 되어 있는 학습자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학습자가 그 비결을 배운 후, 다시 수개월 더  충실히  연습한다면 
세하주법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테크닉
이 더욱 원숙해지기 위해서는 좀더 세월이 필요하겠지만요.』


  『······· 』

  『과학적인 이론에 의해 습득한 기술과 단지 경험에 의해 습득한 
기술,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중년사내의 엉뚱한 질문. 지윤은 그것이 굳이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언가 설명하기 위해  말머리
를 꺼내고 있는 것일 거였다. 지윤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임으로써 
다음 말에 대한 호기심을 표시했다.
              
  『과학적인 이론이란 항상 그 재현이 가능합니다. 누가 시행하더
라도 이론에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그 결과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적인 이론이란 사람에 따라 그 표현 방법이  천차만별
일 수 있으며 그 시행 결과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어요. 가끔 동일
한 결과에 도달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무수한  시
행착오를 거친 다음에야 가까스로 선험자(先驗者)의 그것에 근접하
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를테면 장인들의  기술전수  과정이 
그렇지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지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면 그의 말이  이어
질 것이었다.

  『기존의 교수법에서, 다른 연주법도 대개는 그렇지만, 세하주법 
역시 그 생체역학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근본 원리를 모르는 채  선
험자의 막연한 느낌에만 의존하여 교수와 학습이 이루어져  왔습니
다. 그러므로 대체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게 되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좀체 원하는 테크닉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지요. 흔히 말하듯 '감(感)'을 잡을 때까지 노력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담, 선생님께서는 세하주법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정립
하고 계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
                  
  『맞아요. 나는 해부학적인 원리에  기초한  노하우(know-how)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하주법에 있어서의 해부학적 또는  생체역학적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부위를 어떻게  강
화시켜야 그러한 생체역학적 메커니즘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 훈련을 해야 가장 경
제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
고 있다는 말이지요. 세하주법에 어려움을 겪는 초보 학습자와  세
하주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프로 기타리스트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해부학적인 차이를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노하우
(know-how)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레슨을 통해  세하주법
에 아직 미숙한 학습자에게 적용시켜 단기간에 능숙해지도록  하는 
훈련 과정을 언제든지 그대로 재현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재현성(再現性)'입니다. 과학적인 이론이라면 항상  재현
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막연히 '감(感)'에 의존하는 것으로
는 바로 이 '재현(再現)'이 불확실할 수밖에 없어요.』

  지윤은 감전(感電)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중년사내, 그는  지금 
연주법(테크닉)과 해부학을 결부시킨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었다. 무서운 이야기였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녀의 날카로운 안목
이 그 점을 놓칠 리 없었다. 그것은 테크닉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궁극의 목표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놀랍군요. 선생님께서는 혹시 의학을 전공하셨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애오라지 기타 테크닉을 연구하기 위해서 해
부학에 관해서만 조금 공부했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해부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어 가는군요. 서당개 3년이
면  풍월을 읊는다 했으니···』

  『그러한 공부를 시작하시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으셨겠죠?』
지윤의 까아만 눈동자가 더욱 초롱초롱해졌고, 우유빛 뺨이 발그스
레하게 홍조를 띠었다. 갸름한 그녀의 얼굴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
는 것은 아마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탓일 것이었다. 때문에 중년
사내는 스치듯 현깃증을 느꼈다.

  『해부학이 나에게는 유일한 해결책이었지요.』 중년사내는 잠시 
뜸을 들이며 허공을 응시하다가 마치 독백을 하듯 말을 계속했다.
                  
  『어린시절부터 그랬지만, 당시 나에게는 기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선생님이  되어 
주실만한 분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그러한  분
이 계셨다 해도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엄두를 내지 못
했을 것이니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요. 한데, 기존 기타  연주법에
는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사정이  그러하
니 테크닉에 대한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곳이란 오로지 해부학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주
체가 사람이니 해부생리학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테크닉
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
다. 연주행위를 하는 진정한 주체는 우리의 정신인 것이며  육체와 
악기는 그 수단이며 도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정신과 육체 그리고 
악기 ― 이 세가지에 음악을 합한 것이 모든 테크닉의 근본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이제 연구과제 중의 하나는 자연스레 풀린 셈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궁금증의 해소는 더욱 많은 궁금증을 낳았다. 말하자면  지윤
에게 있어서 그는 여전히 「연구대상」이었다.